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문단 편집) === 정치적 평가 === 수십 년 간 로마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던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숨통을 끊었으며, 파르티아와의 우호관계를 수립해 로마의 동방 정책의 기틀을 놓았다. 전후처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소아시아[* 오늘날의 [[튀르키예]]]와 시리아[*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일대를 완전한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 때 차지한 영토는 동로마 때까지 갔다. 레반트 지역은 폼페이우스 시절부터 거의 딱 700년 뒤인 630년대까지, 소아시아 중·동부는 1100년도 더 뒤인 1070년대까지 유지했다.[* 소아시아 서부는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루스의 유증 이후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고 나서, 즉 폼페이우스가 나서기 이전에 영유가 안정되었다.] 정책 면에서의 감각도 상당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 소탕 과정에서 사로잡은 해적들에게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이후 이 도시들은 소아시아 지역의 경제 회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파르티아와의 우호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오리엔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폼페이우스가 세운 기본 방침은 사산 조 페르시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지 못하였고 군사적 재능이 자신보다 못한 크라수스보다도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였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같은 유망한 청년들을 돈을 통해 불러모아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재주를 부렸던 사람이었다. 정치가로서는 몰라도 정치적 감각 자체는 나름 뛰어난 편이었다.] 그 결과 원로원에게 계속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동방원정을 마친 뒤 원로원에게 어떠한 확약을 받은 바 없이 군단을 해산함으로써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속주편성안, 고참병 퇴직금 문제를 승인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또한 이를 로마시민들이 불만족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동원하여 평민집회를 통제한 뒤 원로원과 대결하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하였다. 3년 뒤에서야 비로소 그는 이런 수순으로 그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정작 실질적인 지휘는 삼두정 하의 카이사르가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수완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였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삼두정파를 지휘하였던 것은 로마 인근에 머물던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갈리아 전쟁을 위해 자리를 비운 카이사르였다. 당시 호민관에 선출된 뒤 폭력단을 조직해 평민집회를 장악한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전혀 협조적이지 않아서 카이사르의 말만 들었고 또한 원로원이 클로디우스를 막기 위해 밀로를 매수하였을 때도 그는 손놓고 있었다. 결국 로마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으나 폼페이우스의 존재가 이것을 해소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 남았지만 원로원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조금씩 되찾아오는 것을 방관하였다. 결국 상황이 심각해지자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가 나섰고 그는 루카회담을 열어 다시 정국을 삼두정이 되찾아오게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그가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애초부터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닐 위상과 입지가 아예 아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카이사르가 삼두정의 실질적인 리더같이 행동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